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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실 소개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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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사진

합덕수리민속박물관

합덕수리민속박물관은 조선 3대 저수지 중 하나였던 합덕제를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제 1전시실 수리문화관은 면적 360 ㎡의 규모에 50여 점의 수리관련 자료들을 볼 수 있으며, 합덕제 복원모형과 구만리보막이 작업 등을 미니에처를 통하여 단계적으로 알기 쉽게 살펴볼 수 있다.

각 패널별 내용은 수리의 의미와 합덕제의 역사 , 합덕제의 축조방법, 한국의 수리역사, 수리시설 변천사 등이 요약돼 있으며 이를 통하여 전반적인 한국의 수리를 이해할 수 있다.
또한 합덕제 축소모형 디오라마를 통하여 옛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

합덕수리민속박물관1
합덕수리민속박물관2
합덕수리민속박물관3

수리사업이란

수리사업이란 비 , 눈으로 생긴 물을 사람이 적합한 장소에서 필요한 시기에 이용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물을 관리하는 시설을 만드는 사업을 말한다.
비, 눈을 사람이 조절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댐, 저수지, 제방, 양배수장, 보, 집수암거, 관정 등의 치수시설을 함으로써 한해(旱害), 수해(水害)를 피하고 필요에 맞게 관리해 나가야 한다.
이런한 치수사업은 인류가 정착생활을 하면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치국(治國)의 기본과제의 하나였다.

합덕 방죽의 축조기법

합덕방죽은 합덕읍 운산리와 성동리 사이의 너비 0.7~1.5km 정도에 이르는 넓은 하천 계곡의 끝부분을 막아 축조된 저습지 둑으로 충남대학교 박물관이 1, 2차 시굴 조사에 의해 축조기법이 밝혀졌다.

1차 시굴조사에는 본동수문과 왜목사이의 제방을, 2차 시굴조사는 고평수문 부근의 제방 절개를 통해 실시되었다.
두차례에 걸친 조사를 통해 제방은 전통적인 공법에 따라 순수한 흙을 판축기법을 이용하여 축조하였음이 판명되었다.
제방은 여러 차례에 걸쳐 덧쌓았는데 제방 내부 방면에 집중적으로 덧쌓았다.
제방 내부가 물과 직접 맞닿아 있어서 쉽게 손상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무리말뚝공법

수직 말뚝을 지반에 일정한 간격으로 박아 놓은 토목공법으로 흙으로 쌓은 제방이 쉽게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제방 축조 시 길이 60cm정도의 말뚝을 0.3~1m 간격으로 세워 놓았다.
말뚝을 세운 후 흙을 채우면 흙이 쉽게 무너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또한 심투압 원리의 이용으로 제방 안의 습기를 밖으로 배출하여 제방이 쉽게 무너지지 않게 하는 역할도 한다.
이 기법은 주로 저습지 둑에 사용하고 있으며 고려부터 조선조까지 널리 이용되었다.

지엽부설공법

점토에 짚이나 가는 나뭇가지 , 나뭇잎을 섞어 반복적으로 다져서 쌓은 후, 굵은 모래를 쌓고 다시 점토층과 모래층을 번갈아 쌓는 기법이다.
짚이나 나뭇가지 등의 유기물질을 점토에 섞는 이유는 외부의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한 것이며, 굵은 모래를 깐 것은 수분 조절과 토양 수축률 등을 고려한 것이다.
백제시대의 부여 궁남지나 김제 벽골제, 7세기 일본 나라시대의 사이야마이께 등지에서 이와 유사한 공법이 사용되었다.

제2전시실 합덕문화관은 면적61㎡의 규모에 합덕(당진)지역을 대표하는 문화를 패널 별로 설명하였다.
각 패널별 내용은 합덕문화의 형성, 성동산성, 솔뫼성지, 오페르토 도굴사건의 행로, 합덕의 속담 등을 이해하기 쉽게 요약하였다.
특히 월경지의 형성과정과 대동여지도 등 당진지역의 옛 지도를 살펴볼 수 있다.

합덕문화의 형성

합덕지역은 삽교천이 흐르면서 넓은 평야지대를 형성한 합덕읍ㆍ우강면 일대 , 즉 예당평야의 일부인 소들강문 지역을 이른다.
들이 넓게 펼쳐져 있어 이 지역의 문화를 '들의 문화' 라고도 일컬었다. 평야가 넓어 일찍부터 수리가 발달하였기에 곡물이 넉넉하고 살기 좋은 곳이어서 내포문화의 중심지로 꼽았다. 내포는 충남 북서쪽 가야산 주변 지역을 말하는데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내포 지역을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고 하였다.
넓은 평야와 삽교천 해안을 끼고 있는 내포는 농수산물이 풍부하였으며 수운교통을 이용한 상업이 발달한 곳이었다.

개방성·진취성·개혁성의 문화

내포는 충청 내륙의 보수성과는 다르게 '개방성', '진취성', '개혁성'의 특성을 지닌 지역이다.
'당진(唐津)이라는 지명에서도 알 수 잇듯이 삼국시대부터 당나라를 오가던 큰 나루터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며 일본과 교류를 하였던 지역으로, 지리적인 여건상 외래 문물을 다른 지역 보다 빨리 받아 들였던 곳이다.
평야가 발달하고 창(倉)이 많은 것으로 보아 농민들에 대한 수탈이 심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이렇나 역사를 가진 합덕은 천주교 박해, 동학농민운동 등 근세기에 여느 지역보다 심한 상처를 견뎌 내면서 정신적 문화를 성숙시킨 고장이다.

후백제의 거점지 성동산성

합덕읍 성동산에 있는 성동산성은 전설에 의하면 후백제의 견훤이 왕건과 대치하고 있을 때 축조한 것이라고 한다.
성동산성의 아래쪽에 있는 합덕방죽과 쌉사리방죽도 성동산성에 물고 있던 견훤이 군마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만든 것이라는 전설이 전해진다.
합덕 신리에는 '군량이'라는 지역이 있어 군사들에게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해 큰 평야가 있는 이 지역에 견훤의 부대가 주둔했을 것이라는 견해에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
한편, 견훤이 성동산성에서 쏜 화살이 삽교천 너머 왕건이 주둔하고 있던 예산 신암면 용산까지 날아갔다는 전설도 내려오고 있어, 이 지역이 후백제에서 고려로 넘어갈 당시 접전지였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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